필립 퍼키스 <사진 강의 노트> ∙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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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책 읽고 쓰기
전시장에 간다. 눈길을 끄는 사진 앞에 선다. 그것을 5분 동안 바라본다. 사진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 연습1. 바라보기, p.15 사진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꽤나 드문 경험이 됐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진은 인터넷 상에서 소비되는데, 유통의 대표주자격인 소셜 미디어는, 점점 더 빠르게 사진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뭐, 이미지의 빠른 소비가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사진들을 보며 영감을 얻을 수도 있고, 많은 사진 중에서 이목을 끄는 사진들을 쉽게 가려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진을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닌 감상하려 할 때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사진은 찰나의 예술이고, 우리는 그것을 찰나에 인식하기도 하지만 때로 사진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사진과 윤리에 대한 생각: 야생 사진가에 관한 두 편의 재밌는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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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진 이론과 생각
유튜브에서 재밌는 영상을 발견했다. 야생 사진가에 관한 애니메이션인데, 영상을 보고 나니 '무엇을 왜 찍는가' 하는 사진의 본질적인 물음과 윤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포토 헌팅이라는 표현이 있듯 동의받지 않은 상황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본질적으로 공격에 가깝다. 사진은 카메라를 대상에게 겨누며, 맥락을 제거하고, 대상의 순간을 임의로 잘라내 박제시키기 때문이다. 사진이란 현실적 맥락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프레임을 통해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는 일에 더 가깝다. 문제는 맥락 자체이기도 하지만, 맥락을 창조하는 과정에도 있다. 사진가는 생각보다 상황에 깊숙히 관여하며, 책임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피사체를 향해 카메라를 드는 공격과 조준이 명분을 갖기 위해서는, 진정성이 담긴 사진가만의 대답이 필요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시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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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책 읽고 쓰기
시간이란 무엇인가? 보통, 시간 하면 직선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고 종교나 다른 차원을 이야기 할 때만 직선적이지 않은 시간의 특징을 이야기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시간은 (여기에 공간을 더하면) 광원뿔 형태로 이뤄져있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25세에 깨달았는데, 10년 뒤 그는 장소에 따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름을 알게 된다. '시간은 유일하지 않으며, 궤적마다 다른 시간의 기간이 있고, 장소와 속도에 따라 각기 다른 리듬을 갖는다.(p.98)'는 것이다. 저자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이란 '물질들이 만들어내는 사건들 간의 관계, 이 관계들의 동적인 구조 양상이다.(p.222)'이라 정의한다. 무슨 말일까? 저자에 따르면 시간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양자화되어 있다. 여기에는 흐름이나 질서가..
비비안 마이어: 몇 가지 추측과 사진에 대한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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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진가
무언가를 표현함으로써, 존재는 살아있음을 증거한다. 를 봤다. 다큐멘터리는 인터뷰와 유품을 통해 마이어의 생애를 추적한다. 영상을 보며 조금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던 그녀의 삶은 외롭고 가난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계속해서 그것도 아주 많이 찍었다는 것이다. 인터뷰이들 중 일부는 비비안이 저지른 폭력과 히스테리를 폭로하고, 또 대다수가 광적인 수집증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홀로 살아가던 그녀의 현실적 상황과 더불어, 아마도 어렸을 때 경험했던 폭력과 상처가 가득한 그녀에게, 사진이란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도구이자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비비안 마이어는 여자였고, 또 보모였다. 따라서..
X,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 자크 엘룰 <뒤틀려진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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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책 읽고 쓰기
어느 교회의 외벽, 네온 사인을 통해 반짝 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문구를 보며, 사랑은 너무도 쉽게 왜곡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타인이 정의될 수 없는 것처럼 정의될 수 없는 활동이다. 정의될 수 없다는 건, 특정한 범위에 한정될 수 없다는 것, 또 그래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과 '사랑'이 정의되고 있지는 않은가. 자크 엘룰은 기독교가 뒤틀렸다 말하며, '신학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적,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문제들에 대한 답을 성경 본문에서 찾고자 했'음을 하나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성경의 메시지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필요에 의해 사용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독교는 시대에 부합..
두 망나니의 여행 이야기: 잭 케루악 <길 위에서>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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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잭 케루악 를 읽었다. 이것이 '드디어'인 이유는, '드디어' 3주 만에 1, 2권을 다 읽고 지금 이 글을 쓴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번에 중고 서점에서 를 사 오기 훨씬 전부터 책의 제목을 좋아하여, 언젠가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까지 하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를 읽어보고자 했던건, 책 속의 주인공 샐이 말하듯 '길은 곧 삶이니까.'라는 지극히 평범한 문장과 연관이 있기도 하고, 삶이 어느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굳이 따지자면 매 순간의 길이 곧 목적지라는, 평소 생각을 대변하는 적절한 문구였기 때문이다. 불꽃치듯 요동치는 그들의 심장 소리와 열정, 그것을 표현하는 잭 케루악의 때로는 길고도 지루한, 잡담들이 가득찬 아주 긴 문단들이 이 책에 널브러져있다. 책을 읽기 전까..
좋은 건축, 좋은 공간에 대한 고찰: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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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 보면 '이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도시들이 있었다. 그러한 도시들에는 한결같이 사람과 건축물이 어우러진 공간이 있었다. 도시의 특성상 자연과도 완벽히 어우러진 도시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역할을 하는 공원과 강,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침마다 햇볕이 내리쬐는 곳이 있었다. 그럴 때면, 그곳에 사는 이들이 참 축복 받았다 생각하며 그저, 부러워 하곤 했었다. 건축물과 공간, 그리고 아파트 하나의 건축물은 벽을 쌓고 구분을 통해 단절된 공간을 만들어 낸다. 한국의 건축물=아파트를 볼까. 한국형 아파트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많은 이익을 창출해 내려는 건축물이며, 프라이빗한 공간을 창출한다. 이러한 프라이빗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프라이빗 할 수 밖에 없다'는..
반려 관계에 대하여 : 김애란 <노찬성과 에반>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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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개가 키우고 싶었고, 조금 자라서는 고양이가 키우고 싶었지만 실제로 키워본 적은 없다.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었고, 그러다 혼자 나와서 살게 되었는데도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못한 이유는 며칠이고 집을 비우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찬성도 처음부터 개를 키울 생각은 없었다. 어쩌다보니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져 있는 거 같은 개에게 얼음 한 조각을 주게 되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함께 살게 되었다. 찬성이 데려온 개, 에반은 이미 많이 늙어 있었다.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는 기력 때문에 동물 병원에 찾았다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가난한 찬성은 치료비를 댈 수 없었고,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안락사'를 택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