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
까만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잘생긴, 베스트 셀러 작가, 김영하가 최근 <여행의 이유>라는 산문집을 펴냈다. 작가는 이제껏 글쓰기와 더불어 여행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 왔다고 말한다. 그는 틈만나면 배낭을 메고 세계를 여행했고, 그러한 경험들은 소설가로서의 지평을 넓힐 수 있게 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는 어떤 책?
<여행의 이유>는 김영하 작가의 지난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쓴 아홉개의 에세이를 엮은 책이다. 여행에 관한 감성적인 글이라기 보다는 '여행이란 무엇인지, 여행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는지, 우리는 왜-어떻게 여행하는지'에 대한 인문학적 사고가 담겨있다.
가장 흥미롭고, 재밌게 읽었던 부분은 김영하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담긴 '추방과 멀미'와 일종의 인지 부조화로 서늘함을 느꼈던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그가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야기 하던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였다.
여행 이야기만은 아닌 여행 이야기
<여행의 이유>의 주제는 단연 '여행'이다. 그러나 책 속에서 여행의 정의는 일상과 삶 등으로 확장되어 간다. 여행은 그런 것들과 단절된 것이 아닌 맞닿아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인간이 지구라는 낯선 행성에 태어나며, 이미 그곳에 존재하는 이들의 환대를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여행자도 현지인들의 환대를 필요로 한다. 삶의 많은 순간들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여행 또한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을 여행하는 인간: 호보 비아토르(Homo Viator)로 정의했는데, 이는 단지 인간에게 내재된 이동의 본능을 지적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 일상과 삶에서 여행의 모습들이 묻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인생이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에 도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여행은 먼저 도착한 이들의 어마어마한 환대에 의해서만 겨우 시작될 수 있다. 신생아는 자기가 도착한 나라의 말을 모른다. 부모와 친척들이 참을성을 가지고 몇 년을 도와야 비로소 기초적인 언어를 익힐 수 있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다. 충분히 성장하면 인간은 지구에 새로 도착한 여행자들을 환대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것을 갚는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갈 때, 남아 있는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을 환송한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문명은, 마치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를 배웅하듯이 망자를 대한다. 관 속에 노잣돈이나 길동무 인형을 넣어준다. 철저한 무신론자조차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면 그들이 다음 세상에서 평안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한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대체, 여행이란 무엇인가. 김영하 작가의 여행은 관광과는 다르게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여행은 마치,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 것과 유사하다고. 우리는 소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그렇게 때로는 현실에서 달아나고, 다시, 그러나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일상으로 되돌아 간다. 다시 '느끼기 시작'하며, 새로운 시각으로 '경험을 연결'짓고, '정신은 한껏 고양'된 채로 말이다.
물론, 김영하 작가를 포함하여,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보통의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지만, 그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되뇌었을 다짐과 용기, 노력들은 다음과 같은, 어쩌면 아주 오래되었을 그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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